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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신화적 무의식을 따르는 수평적 결합술의 세계, 라오미 작가

김남수   안무비평

 

#1. “잔치는 신들의 超宇宙的인 힘을 뜻한다.”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2. “틈새는 물질의 열림이기 때문에 ‘힘’의 중심의 의미가 황금고리에 부여된다. 그것은 “문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중심”이며, 거기에 뿔피리가 걸려 있기 때문에 ‘힘’이다.” 

(상소네티, <성배와 연금술> 중에서)

 

라오미 작가에게 회화는 하나의 ‘잔치’ 같다. 여기서 ‘잔치’에는 하나의 상[床]이 필요한데, 이는 마니에리슴의 용어로는 ‘타블로’[tableau], 즉 “우주를 구성하는 테이블” 같은 개념이다. 그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모티브와 이미지가 작가의 의도를 따라 배치되는 것이다. 호랑이와 사자의 혼혈, 복숭아, 북한의 꽃을 비롯한 기화요초, 금강산, 민화적 이미지, 문[門], 변형되고 유동화되는 건축 이미지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라오미 작가의 알레고리 전략과 신화적 무의식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지듯 하는 것이다.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제 작품을 예쁘게만 보지 마시고, 작품 속의 메시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작가가 봉인해둔 메시지를 봐달라? 이 기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요청은 라오미 작가가 하나의 ‘잔칫상’처럼 차린 수많은 이미지들의 세계에서 보아내기 힘든 부분이다. 동시에 이미지들의반복, 증식, 그리고 변형이란 초현실적-현실적 과정을 거치면서 ‘소우주를 통한 대우주의 구성’이라는 마니에리슴의 방법을 활용하는 지점에서 긴요한 것이다. 실제로 라오미 작가는 “이물관물[以物觀物]하라” 라고 발언한다. 물로써 물을 본다? 여기서 객관으로써 객관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객관으로 객관을 응시하는 관점을 만드는가. 어쩌면 이 지점에 대한 깊은 관심표명이 라오미 작가와의 대화 내지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마스터키가 될 것 같다.

라오미 작가가 진행하는 작업들은 굉장히 다채롭고 현란하면서도 동시에 단조로운 느낌을 얼핏 던져준다. 그 이유는 그 색채감각이나 배치감각이 탱화라든가 무신도라든가 감로도, 혹은 민화, 혹은 감모여재도 등등 전통적인 회화의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컨템포러리와는 다소 격차가 있는 듯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얼핏의 시각적 인상은 완전한 착오이자 걷어내야 할 환영이다. 마치 한 꺼풀의 샤막처럼 이 영향관계는 마니에리슴적인결합술의 우주를 새롭게 창출하려는 ‘미시모방’(벤야민)으로 바뀌어질 수밖에 없다. 뭐랄까, 라오미 작가는 수많은 동서고금의 신화적 이미지들 사이에 ‘틈새’를 열고, 그 열린 경계마다 황금고리를 걸어서 “신의 얼굴과 대면하는 거울”과 같은 알레고리의 세계를 구성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날이 오는 어떤 신성성의 유토피아 세계. 이런 의미에서 라오미 작가의 작품은 장식적인 미술처럼 보이다가도 컨템포러리의 팝아트처럼 확 육박해왔다가 다시 종교적 ‘힘’을 빌린 샤머니즘적 컨템포러리로 슬쩍슬쩍 변형생성된다. 이는 실로 이상한 일이며, 그가 추구하는 이 ‘힘’의 영역이 단순히 알레고리의 지적 해석적 영역이 아니라 직접 체험이자 그것도 물신주의적 체험으로서 그 부정성을떨쳐낸 형태임을 증명한다. 이는 무슨 얘기인가.

마니에리슴은 우리에게 흔히 매너리즘으로 읽히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서 “육화된 신성”의 타블로[tableau] 전략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잠깐 풍미했던 사조였다. 195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른 저변에서 이 마니에리슴이 다크컬처, 고딕, 심층무의식, 자기조직적 생태학 등등과 어울리며 생명성과 신성성의 징후가 짙은 세계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라오미 작가가 단순히 전통을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라 이러한 전통과 현대 사이의 황금고리를 엮어서 물신주의라는 어두운 힘을 긍정성의 힘으로 작동시킨다고 말한다면 과할까. 

아닌게 아니라 라오미 작가는 유토피아와 자본주의 사이의 계약 관계를 어떤 탁월한 물신주의적 회화 세계로 표현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20세기 영화의 현대적 리듬과 속도로 기존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태초와 고중세의 이미지조차 ‘차이의 정치학’으로 지금 이곳으로 끊임없이 호출하는 것이 자본주의고, 그 호출의 신호음이 유토피아 아닌가. 욕망의 순환곡선은 이 호출과 그에 잇다르는 차이의 문화적 소비가 연결되는 망 속에서 자체의 호흡을 가져가고. 라오미작가가 자주 다뤄온 동아시아의 유토피아 이미지 역시 이 욕망의 순환적 궤적 속에 개입하거나 이미 들어가 있는 경우로 보이기도 한다. 가령, 십장생 이미지라든가 무릉도원 이미지라든가 민화 이미지라든가 그 이미지 내부에 이형변형된 생명체가 초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세계-내-의 존재로 우리 앞에 육박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의 시각적 이미지들은 대체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타자의 욕망, 회고된 욕망처럼 느껴질 소지가 있다.

라오미 작가가 메시지를 수신함에 꽂아두는 것은 위의 쉽게 파악되는 욕망의 순환궤적 속에서 시장적 질서, 시각적 관람 패턴에 복무하는 것을 거부하는 문화적 태도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에는 그러한 거부의 스탠스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독특한 물신주의적 과잉으로부터 새롭게 읽혀질 여지가 다분하다는 의미다. 즉 물신주의를 가속화시켜서 오히려 이 세계 전체가 물신주의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처럼 물신주의 자체로부터 새로운 지각과 인식이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포스트-페티시즘이라고 할 만한 기묘한 형국. 과거 대감굿에서 “욕심도 많고 탐심도 많은 내 대감”에게 “앞다리 선각 뒷다리 후각 양짓머리 걸안주” 없이도 대감신에게 큰 복과 재수를 받는 원리가 이 형국이다. 독일 문화학의 거장 하르트무트 뵈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물신숭배를 믿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물신숭배주의자들이다.”

물신숭배적 태도로 물신주의를 배지기한다는 것, 초현실적 이미지를 현실적인 발상과 배치 속에 묘하게 결합한다는 것은 라오미 작가의 ‘이물관물’[以物觀物]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화적 전형, 즉 민화로부터 나온 앙증맞은 이미지가 무한증식하면서 프랙털적 시각 세계를 낳는다거나 사진 스튜디오에 놓여진 금강산 병풍처럼 보이는 이미지 앞에 호랑이와 사자의 혼혈동물들이 ‘현신’[現身]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체적 변신의 동사 중 하나 – 즉, “영상적 이미지로 몸을 나타내다” 라는 식으로 침투하고 교란하는 퍼포머티브가 작동한다거나 청동거울처럼 보이는 북들의 연속적 배치가 그 북의 가죽을 긋는 파괴적 행위로 금속성의 울림을 환청하게 한다거나 하는 작업들이 큰 방향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 전환은 문의 틈새처럼 눈을 바짝 대고 봐야 하며, 마음을 열어야 한다. 열린 심안[心眼].

라오미 작가는 얼핏 장식적으로 보이는 물신성의 이미지에 복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의 가속과 증식 그리고 파괴에 의해 새로운 결합술[ars combinatorial]의 가능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라오미 작가는 말한다. “전통적인 소재와 현대적인 발상을 한 폭의 그림에 담으려다 보니, 고전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고전적인 인물들뿐인가. 어느 목욕탕 장면에는 어떤 호랑이 닮은 요괴가 욕탕 가까이 있는데, 곁에는 한 소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 알레고리적 장면의 속사정은 이들의 만남과 결렬이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신화 속의 가부장적 체제를 현대적으로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알량한 한 시대를 넘어서서 초역사적 비전을 ‘미녀와 야수’처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메시지를 수신하려면, 라오미작가의 황새 같은 지식의 거대한 뜀뛰기 혹은 바람구두 스타일 걸음을 뒤쫓을 필요가 있다. 그의 뒤를 쫓다가 뱁새걸음은 가랑이가 북 찢어지며 종종종 하겠지만, 문득 하늘의 별자리를 보게 될 것 같다. 하늘의 타블로[tableau]가 차린 잔칫상.

Rhaomi and the World of Horizontal Ars Combinatorial following the Mythical Unconscious

Kim Namsoo    Choreography Critic

 

#1. “The feast means the supernatural power of the gods”. (Gaius Sallustius, historian)

 

#2. “Since the gap is the opening of matter, the golden ring/circlesignifies the center of ‘force’. It is the ‘center’ because it is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door’, and it is ‘‘force’ because a horn is hung on it.” (Paul-Georges Sansonetti, from Graal et Alchimie) 

 

Painting for Rhaomi is just like a ‘feast’. For a ‘feast’, a table is needed, which is called ‘tableau’ in Maniérisme, that is, a concept similar to “a table constituting the universe”. So many motifs and images are arranged, as it were, on the table according to the intention of the artist that the table cannot bear it anymore. In Rhaomi’s work, we find innumerable elements of allegorical strategies and mythical unconsciousness as if they are placed on a table: the hybrids of tiger and lion, peach, strange flowers and outlandish grasses including flowers of North Korea, Mount Kumgang, images from folk paintings, door, architectural images that are transformed and fluidized. The artist’s message is clear: “I hope you do not view my works just as pretty works of art, but see the message in them.” 

 

Asking the audience to look at the message sealed up by the artist? This basic and legitimate request, however, is a difficult task in the world of innumerable images arranged by Rhaomi like a ‘banquet table’. At the same time, it is crucial to utilizing Maniérisme’s method of ‘constructing the macrocosm through the microcosm’ through the surreal-realistic process of repetition, multiplication, and transformation of images. Actually, Rhaomi says, “See objects through the perspective of objects (以物觀物)”. Seeing objects through objects? What does it mean here to see objects through objects? How can you establish a perspective to gaze on the object through the object? Perhaps a deep interest in this point is likely to be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dialogue with Rhaomi or her work as a whole. 

 

The work Rhaomi is undertaking is extremely multifarious and dazzling, but at the same time it seems to have a tinge of monotony. Since her sense of colors and composition seems to have been influenced by traditional paintings such as Taenghwa (幀畵: altar portrait of Buddha in the Buddhist temple), Mooshindo (巫神圖: the painting of Shamanistic spirit), Ghamrodo, folk panting, or Ghammoyeojaedo (感慕如在圖: decorative painting depicting ancestral shrines and tablets), her work at first glance looks quite distant from contemporary painting. However, this impression that one gets at first glance is a complete error and an illusion that has to be removed. Like a sharkstooth screen (a translucent curtain for stage), the influenceis bound to be transformed into a ‘micro-mimesis’ (Benjamin) to create a new universe of the ars combinatorial of Maniérisme. For Rhaomi is opening up the ‘gap’ among the myriad of mythological images of all times and places, and hanging the golden ring/circlearound each open boundary to build a world of allegory like the ‘mirror to encounter God face to face’. A utopian world of certain sacredness that looks vague now, but that is in time to be encountered face to face. In this sense, Rhaomi’s work sometimes looks like decorative art, sometimes like contemporary pop art, and then is transformed into contemporary shamanic art resorting to the religious ‘power’. This is indeed a strange thing, and proves that the domain of the ‘power’ she pursues is not merely an area subject to intellectual interpretation of allegory, but a direct experience, a fetishistic experience at that, with its negativity removed. What does this mean? 

 

Maniérisme is usually known to us as Mannerism, which was a trend popular for a short period of time between the Renaissance and the Baroque, focusing on how to use the strategy of the tableau of the “deity incarnate”. On the outskirts of Postmodernism, Maniérisme has emerged in the West since the 1950s as a world-view characterized by its emphasis on vitality and sacredness, a world-view particularly associated with the dark culture, gothic, the deep unconscious, self-organizing ecology and so on. Is it too much to say that Rhaomi is not an artist who merely reproduces tradition, but rather combines the tradition and modernity with the golden ring/circleto tap into the dark power called fetishism to activate the force of affirmation? 

 

To be sure, Rhaomi’s work can give the impression that it expresses the contractual relationship between utopia and capitalism in a kind of superb fetishist painting. Isn’t it that in the modern rhythm and speed of the 20th century film and with its ‘politics of difference’, capitalism ceaselessly summons to us here and now not only the existing images but also the images from the prehistoric times, the ancient and medieval ages? And isn’t it that the dial tone of the call is utopia? In the network that connects this call and the subsequent cultural consumption of differences, the recurring curve of desire retains its own breath. The utopian images of East Asia, which Rhaomi has often drawn upon, also seem to intervene in this cyclic trajectory of desire or is already in it. For instance, the images of the Ten Longevity Symbols (十長生), The Peach Blossom Spring (武陵桃源), and the images of folk paintings as well as the living organisms that have been transformed within those images vividly come to us as surrealistic and at the same time realistic presences within-the-world.The visual images of desire, however, are likely to be felt as the desire of the other, the recollected desire that capitalism requires. 

 

Rhaomi puts the message in the mailbox and it is a cultural attitude that refuses to serve the market system and the visual pattern of watching art works in the above-mentioned cyclic trajectory of desire that can be easily grasped.And her work contains such a stance of refusal, which means there is room for a new interpretation, unlike the unusual fetishist surplus.In other words, her work accelerates fetishism and proves that the world as a whole is rather sustained by fetishism, and new perceptions and awareness emerge from the fetishism itself like the saying “anguish itself is enlightenment”. A strange situation that may be called post-fetishism. This is how one receives blessings and good fortune from Daegamshin (the spirit of the house site) without all kinds of offerings devoted to “greedy and avaricious Daegamshin". Hartmut Böhme, an authority on German cultural studies, says, “Our reason does not believe in fetishism, but culturally, we are fetishists.” (Hartmut Böhme) 

 

To tackle fetishism with a fetishistic attitude, and to ingeniously combine surrealistic images with realistic ideas and arrangements, is Rhaomi’s strategy to ‘see objects through objects’ (以物觀物). In Rhaomi’s work we see cute images borrowed from folk paintings, a well-known cultural paragon, proliferating infinitely and giving birth to the visual world of fractals; hybrids of tiger and lion being ‘incarnated’ (現身) (one of the verbs to refer to bodily transformation in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三國遺事』) in front of the images in photo studio that look like a folding screen depicting Mount Kumgang; activating the penetrating and disturbing performative like “representing the body with visual images”; consecutive placement of drums that look like bronze mirrors and the destructive act of tearing up the hides of drums creating auditory hallucinations of metallic vibration. All this work brings on a fundamental change of direction.The change must closely observed like a gap in the door, and we should open our mind.The mind’s eye wide open. 

 

At first glance, Rhaomi does not yield to the decorative images of fetishism, but rather allows us to move towards a world where new ars combinatorial is possible through acceleration, proliferation, and destruction of those images. She says, “Trying to put traditional materials and modern ideas into one canvas, classical characters are bound to appear.” Only classical characters? In a scene depicting the bath, a tiger-like specter is near the bath, and beside it is a girl, covering her face with her hands. This allegorical scene makes us ponder over for a while the meaning of their meeting and parting. Perhaps it is a criticism from a modern perspective of the patriarchal system as it is found in mythology. Or it might be a representation of the trans-historical vision beyond this petty and frivolous era like ‘Beauty and the Beast’.To receive the painter’s message, one needs to follow the giant, stork-like skipping of her stunning knowledge or her steps that can be probably compared to the ‘semelles de vent’ (phrase referring to the poet Rimbaud) Following her with mincing steps, we may suffer from torn-apart crotch. Yet suddenly we are likely to see constellations in the sky. A table of feast prepared by the tableau of heaven. 

밤의 감성 속에 펼쳐진 꿈의 서사

김경민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밤의 시간이 시작된다. 밤의 고요함과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우주적 세계가 눈을 뜬다. 밤은 깊은 침묵과 어둠으로 존재의 형상을 감추기도 하지만 달빛으로 물든 존재의 형상을 다채롭게 빚어내기도 한다. 어둠의 수면 위로 서서히 드러난 존재들은 스스로가 뿜어내는 빛과 울림으로 광대하고 심원(深遠)한 밤의 시공간을 창조한다. 모든 것이 어둡거나 혹은 사라진 가운데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꿈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인간과 자연,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교차되고 어우러지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곳이다. 황홀하고 찬란한 우주적 몽상의 세계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구절이 상징하듯 낮의 시간에 경험했던 상실의 순간들은 밤의 시간을 통해 다시 회복되고 거듭난다. 창조적 영감을 갈망하는 예술가들에게 밤의 시간은 이성의 틀에 갇혀 있던 그들의 감성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단 밤이라는 물리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밤의 감성을 통해 펼쳐진 꿈과 몽상의 세계이다. 현실의 한계 속에 억눌려 있던 욕망과 상상력은 밤의 감성을 통해 되살아나며, 깊은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혹은 늘 꿈꾸고 상상했던 모든 일들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삶과 꿈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신비롭고 기묘한 세계를 보여주는 라오미의 작품은 또 다른 세계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곳은 이성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세계 너머의 세계이자, 의식 너머의 아련한 그리움이 깃든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꿈속에 펼쳐진 욕망과 이상의 판타지

 

“…어둠의 시기에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은 마치 꿈을 꾸고서 그 부분만 유독 또렷하게 기억나는 인물이나 풍경처럼 색깔이 선명하다.…”

- 작가노트 중

 

라오미는 밤의 감성 속에 펼쳐진 꿈과 환상의 서사를 창조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동서양의 고전, 신화와 전설, 민담과 동화의 서사를 중심으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각종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들은 그의 몽상 속에서 자유롭게 변형되거나 해체되어 작품 속에서 재구성된다. 또한, 서사 속에 내재된 채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져온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욕망들은 여러 가지 상징과 알레고리의 도상들로 다채롭게 표현된다. 가령 작품 <현자의 돌>(2014)은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던 인간의 원천적인 욕망과 이를 투영하는 동서양의 상징물로 불로장생의 소우주를 구성한다. 출렁이는 파도 위로 사슴과 학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으며, 바위 곳곳에서는 불로초와 소나무가 자라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청춘의 여신 헤베의 곁에서 조선시대의 풍속화에서 방금 나온 듯한 인물이 유유히 바다 낚시를 즐긴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그토록 만들어 내고자 애썼던 불변불멸의 물질인 ‘현자의 돌’은 풍경의 하단을 가로지르는 테이블 위에서 선명하고 붉은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갖가지 형상들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인간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력을 은유하며 하나의 몽상 속에 펼쳐진 작은 세계를 이뤄낸다. 

작품 <몬스터 멜랑콜리아>(2016)에서는 부귀영화, 입신양명, 불로장생 등 인간의 다양한 소망과 복을 기원하는 민화의 경쾌한 도상들과 그 세계에 둘러싸여 우울과 슬픔에 빠진 채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상실과 좌절로 인한 현실 세계의 상처가 꿈과 희망의 세계에서 다시 치유되고 회복되듯 라오미의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이상은 서로를 비추거나 반사하는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의 세계를 마주한 채 공존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바탕으로 이를 이상화하며, 현실과 이상이 함께 공존하는 허실상생(虛失相生)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다.

 

 

낯설고 신비로운 미지의 공간

 

라오미는 꿈과 몽상을 통해 낯설고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간다.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공간적 상상력은 보다 다차원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로 점차 확장된다. 그 세계는 시작과 끝의 경계가 정해지지 않은 무한의 공간이자, 모든 꿈과 가능성이 펼쳐지는 무한 실현의 무대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꿈과 욕망은 천상과 저승, 수중과 우주 공간 등 현실을 넘어선 다양한 초월적 세계를 배경으로 끝없이 변형되고 확장되어 간다.

 

현실세계에서 초월적 세계 혹은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는 형식은 전설과 설화, 민담 등에서 자주 다뤄지는 환상적 서사이다. 라오미는 그 가운데 우리의 전통 무속 신화인 ‘바리데기 설화’를 중심으로 한 입체적 서사를 펼쳐 보인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사극영화미술, 무대미술, 문화재연구소 등을 거치며 공간에 대한 구조적 개념을 직접 경험해온 작가는 이러한 지식을 토대로 초월적 공간인 저승세계를 마치 하나의 영화 세트장과 같은 입체 설치작품으로 구현해낸다. 작품 <눈물 하나가 바다를 일으킨다>(2015)는 지상세계에서 저승세계로 향하는 바리데기의 여정을 조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바리데기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나, 죽을병에 걸린 부모를 살릴 수 있는 생명수와 약초를 구하기 위해 홀로 저승세계로 떠나간다. 비단꽃을 들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큰 바다와 칼과 불의 산, 수많은 지옥문을 건너가는 그의 여정은 전통 병풍의 형태에 문의 구조를 접목한 설치 작품과 그 위에 그려진 상징적 이미지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작품 속에 표현된 문의 이미지 혹은 실제 문과 병풍의 접목 형태로 제작된 3차원적 입체 구조는 현실에서 환상으로 환상에서 현실로 넘나들게 하는 하나의 통로이자 매개체이다. 또한, 병풍의 공간적 구조를 따라 펼쳐지는 그 세계는 현실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의 삶과 시간이 함축된 무한의 공간을 상징한다. 

작품 <물 구경, 꽃 구경>(2016)에서는 저승으로 건너간 바리데기가 무장승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물과 불과 나무의 3년을 각각 보낸 후 결국 생명수와 약초를 얻어 지상으로 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검은 비단의 테이블 위로 바리데기를 상징하는 족두리와 무장승을 상징하는 황금색 호랑이 두상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끝없이 제자리를 회전하는 인형들은 신 앞에서 영생불멸을 염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한다. 설치된 공간의 배경에 자리한 장구 가죽과 검은 깃털로 이루어진 저승꽃들은 잔잔한 수면 위로 비친 깊은 어둠 속 풍경들처럼 지상 세계의 단편들을 아련하게 담아낸다. 라오미는 저승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저승으로 이어지는 무속 신화를 통해 현실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또한, 저승의 공간에서 생명수가 흐르고 약초가 피어나듯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던 죽음의 세계 속에 삶의 아름다움을 공존시킨다. 그는 죽음의 이면에서 삶을 발견하며, 생사의 고통을 초극한 또 다른 세계의 삶을 꿈꾼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이 죽음을 보내는 의례가 ‘상례(喪禮)’이다. …(중략)… 상례에는 차마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따라서 상례의 가장 중요한 정서는 곧 그 잃어버림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일이다. 비단 사람의 존재론적 죽음 뿐 아니라, 사랑 그 후의 이별도 마찬가지이다.…(중략)… 이러한 생에서 겪게 되는 작은 잃음, 작은 죽음들을 극복해 나가려는 의지, 꿈을 꾸고자 한다.…”

-작가노트 중에서

 

한편, 라오미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온 무한한 욕망들을 머나먼 우주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작품 <홀로그램 우주>(2014)에서는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둥근 삶의 궤적을 따라 흘러가듯 연결된다. 무한하고 광활한 어둠 속에서 탄생한 인간과 새, 복숭아 나무 등은 끝없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되풀이하며 순환하는 영원회귀의 삶을 상징한다. 라오미는 “우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홀로그램, 즉 말 그대로 인간이 지어낸 일종의 이미지, 혹은 구조물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원초성이 깃든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우주적 공간 속에 재구성해놓음으로써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 차원의 현실세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그란 장구 가죽에 그려진 화성별곡(2017)에서는 신화와 전설,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캐릭터 등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해체되고 재구성된 전통 민화 속 자연 풍경들은 화성을 배경으로 한 기묘하고 신비로운 별세계의 풍경으로 새롭게 연출된다.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의 몸을 얻기 위해 안드로메다로 떠났던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와 같이 불로장생을 바라는 인류의 욕망은 무한한 우주 세계로 확장되어 나간다. 멀지 않은 미래에 실제 화성의 공간에서 인류의 역사가 계속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이 된 꿈의 세계, 예술이 된 현실의 세계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삶의 불완전함은 초월적 세계로의 갈망으로 이어진다. 또한, 초월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커질수록 그 세계는 점차 구체적인 공간으로 형상화되어 우리의 현실 곁으로 다가온다. 라오미는 최근에 제작한 작품들을 통해 이상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가까운 과거나 미래 혹은 현재의 공간 속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양한 공간 속에 펼쳐진 이상 세계는 얼핏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으로 보이지만 그 세계는 현실 세계의 이면과 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이어져 온 시대적 삶과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다.

 

최근 라오미는 우연히 접하게 된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서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이상화된 현실 세계’의 풍경을 포착한다. 그 사진은 근대 시기에 ‘모던 보이’라 불리던 세련된 차림의 두 남성과 박제된 두 마리의 학을 함께 찍은 것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장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박제된 학과 같이 과거의 그림 속에서 펼쳐지던 이상산수나 불로장생을 상징하던 동식물들은 당시 사진관의 배경과 소품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계산된 연출과 설정된 상황 속에서 하나의 상상적인 현실이 재구성되었다. 사진 속 존재와 순간들은 박제된 생명체처럼 영원히 고정된 채 그 사진 속에서 존재하며,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영원함을 소유하고자 하였다. 라오미는 이 같은 근대의 흑백 사진을 시작으로 근대 잡지 속 그림과 근현대 공간들, 북한의 동화나 설화, 관련 공간들까지 시공을 넘나드는 인간의 욕망들을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동시화’하고자 한다. 

 

작품 <라이거와 타이곤>(2017)에서는 현실과 초현실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무대가 연출된다. 근대 사진 속에 투영된 인간의 다채로운 욕망들은 한 편의 연극 무대와 같은 두 공간 속에서 여러 가지 상징적 형상들로 존재한다. 인간의 몸을 지닌 라이거와 타이곤은 박제된 두 마리의 학과 함께 사진 속 ‘모던 보이’와 같은 포즈를 취한다. 화면의 양쪽에 그려진 금빛 커튼 사이로 동양의 이상산수와 그 풍경의 조각들이 공간 속으로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서양식 계단 아래 펼쳐진 카펫 위로 동서양을 상징하는 동물, 가구, 소품들이 곳곳에 배치된다. 각기 다른 두 개의 장면이 연결된 이 작품은 근대의 스테레오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의 형태를 차용한다. 스테레오 뷰어를 통해 두 풍경이 하나로 겹쳐져 보이듯 인간의 무수한 욕망들은 검은 테두리의 사진 프레임 속에서 현실로서의 환상과 환상으로서의 현실이 하나의 세계로 중첩된다. 이처럼 작가는 사진을 회화로, 회화를 다시 사진의 매체로 전환시키며 현실을 무대로 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작품 <접힌 풍경, 심우장>(2017)에서는 서울 성북동의 근현대 공간 중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을 중심으로 인간-시간-공간으로 연결되는 상징적 풍경이 펼쳐진다. 짙은 모노톤의 화면은 어둠 속에 펼쳐진 아련한 풍경과 같은 시각적인 환영을 연출해내며, 원근감이 모호해진 사물들은 검은 심연의 공간 속으로 곧 사라질 듯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어둠은 사물과 사물, 사물과 공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사물에 내재된 빛과 본성 그대로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한다. 소와 등불, 책과 대나무 등 만해를 상징하는 갖가지 사물들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데 어우러진 채 본태(本態)의 빛을 발한다. 작품의 한쪽 모서리에 적힌 소설 속 글귀처럼 한낮의 역사는 밤의 세계에서 새로운 신화가 된다.

 

褪於日光卽爲歷史 染於月色卽爲神話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 이병주, <산하> 

 

작품 <호월일가(胡越一家)>(2017)는 최근 시작한 ‘사진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써 사진관의 배경과 같이 전시장 벽면 전체를 아우르는 대형 회화 작업이다. 북한의 금강산과 호랑이, 근대의 실내 전경 등 시공을 초월한 공간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공존한다. 흑백 사진 같은 갈색톤의 풍경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와 공간들은 오래된 기억들처럼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거나 스며든다. 그 풍경 앞에서 관람객들은 직접 사진을 찍거나 찍히는 경험을 통해 초현실의 세계를 현실 세계의 공간으로 이끌어낸다. 화면 속 초현실의 세계는 사람들의 사진을 통해 새롭게 변주되며, 현재와 과거, 혹은 미래가 공존하는 다차원의 세계로 무한히 확장되어 나간다. 

 

 

라오미는 꿈과 몽상을 통해 현실의 지평을 넘어선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무화(無化)되는 밤의 세계와 같이 현실과 환상,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시공이 펼쳐진다. 어두운 심연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꿈과 욕망들이 현현한다. 작가는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허실상생(虛實相生)의 세계를 통해 현실의 삶에서 잊고 있었던 진실들을 환기한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통해 우리 속에 내재된 영원회귀의 삶을 일깨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라오미의 순환적 서사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와 그 너머의 삶을 끝없이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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