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에서 거닐고 저승에서 노닐고

송 인 상   독립큐레이터, 주인도 한국문화원 예술감독

 

새해 아침에 복을 기원하는 그림이라는 뜻을 가진 세화(歲畵)가 조선 후기에 출판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에 나온다. 행복, 출세, 장수 등 인간의 기본 욕망을 동물이나 자연, 기물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대다수다. 바로 민화다. 오늘날에 그려지는 민화는 대부분이 이를 그대로 베낀 것인데,사실 이 베낀 민화는 조선시대 그림이지 오늘의 그림이 아니다. 민화 장인이 만들어낸 공예품으로 봐야한다. 창작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베낀 민화와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을 다르게 봐야 하는 이유다. 

 

한국화가 라오미는 민화에서 길을 터 오늘을 그리는 작가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녀가 민화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졸업 직후에 사극 영화의 아트디렉터로 일하면서였다. 그녀는 작가노트에 당시 영화 세트를 만들면서 접한 민화 자체가 흥미롭기도 했고 민화의 초현실성에 심취했다고 적었다. 한 때 고서화를 복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싶었다고도 했다.민화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예술로 끌어내야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마음먹고 민화작가로부터 전통 민화 기법을 배웠고 이 기법을 응용해서 조선시대에 머물러있던 민화를 오늘의 시간으로 돌려놓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사극영화의 아트디렉터, 무대미술,디자이너, 서양화가, 민화가 등 다양한 경험을 살려서 민화에 이 시대의 숨결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영화세트장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면서 익힌 공간 설계와 건축에 대한 지식도 입체작업을 열망했던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여행하며 만난 터키, 인도의 세밀화는 이야기 구조에 적합한 화면 분할에 영향을 끼쳤다. 

 

내가 라오미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12년 초에 열린 화랑미술제였다, 여러 종류의 문들이 펼친 병풍처럼 지그재그로 세워지고 창문이나 문 틈새에는 장생도 이미지가 채워진 작품이었다. 화면 안에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지는 모습이 참신해 보였다. 작품 경향이나 재간으로 보아 대형작품 또는 공공미술로서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 현대미술과 민화의 관계에 관심이 많고 한 때 이와 관련하여 전시까지 기획했던 나로서는 그녀의 작품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민화의 미래를 떠올렸다. 작품을 진지하게 설명하던 그녀의 당찬 눈빛도 그런 나의 기대감에 한 몫을 했다. 그 해 가을 나는 주인도 한국문화원 개원 준비에 참여하였고 그 때 마침 문화원 외벽을 장식할 화가를 찾았다. 주저 없이 라오미가 떠올랐고 그녀에게 벽화를 의뢰했다. 그녀는 두 달 남짓의 작업 기간을 거쳐 원화를 완성했다. 작품은 민화 장생도로 얼개를 잡고 그 안에 조선시대 명화에 등장하는 선비나 여인 등의 한국인 이미지와 인도인들의 사랑을 받는 신 크리쉬나와 코끼리를 함께 배치, 한국과 인도의 정서가 공존하는 독특한 판타지였다. 이 작품은 시트지에 확대 인쇄하여 벽화로 만들어져 주인도 한국문화원의 외벽을 3년째 지키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벽화의 원화가 한국무역협회에서 개최한 제 1회 한류미술공모전(2013) 대상작품으로 뽑혔다. 이 작품은 라오미의 작품에서 공공미술과 순수작품 양쪽 다 인정받은 사례가 되었다. 그 이후 그녀의 그룹전과 개인전을 지켜보면서 변화를 감지했다. 장생도 시리즈로부터 바리데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사유의 확장, 화려한 색감에서 단색 톤으로 변화해가며 보이는 절제된 미감, 평면에서 입체, 설치로 확장해 가는 변화에서 언제나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번 전시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내심 기대하고 있다. 작품들은 바리데기를 주인공으로 꼭두, 동서양의 신화, 우주 등 우리가 현실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대상을 담고 있는데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시공을 초월한 여행을 안내받는다. 특히 이전의 장생도 시리즈와 비교되는 바리데기 시리즈가 흥미롭다. 장생도가 늙음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불로장생 욕망의 표현이라면 바리데기는 죽음이라는 통과의례 이후까지 확장해 가는 인간의 무한대 꿈을 담고 있다.

 

작가가 바리데기에서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바리공주로도 불리는 바리데기는 굿판에서 죽은 사람을 저승길로 인도 하는 신이다. 바리데기는 지역별로 용어와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큰 흐름은 다음과 같다. 칠공주의 막내로 태어난 바리데기는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남의 손에 키워진다. 바리데기가 15세 되던 해에 부모님이 죽을병에 걸리자 딸들에게 유일한 치료제인 약수와 약초(꽃)를 구해오라고 시키지만 모두 거절하고 버려졌던 딸, 바리데기가 나타나 약수와 약초를 가졌다는 저승에 사는 무장승을 찾아 나선다. 바리데기는 저승에 가서 무장승을 만나 약수와 약초를 제공해주는 조건으로 결혼하여 아홉 해 동안 살며 일곱 딸을 낳았다. 약속 기일이 지나고 이승으로 돌아가려는 바리데기에게 남편인 무장승은‘물 구경 꽃 구경하고 갈 것’을 제안한다. 그 순간 바리데기는 저승에 와서 여태까지 먹던 물과 보던 꽃이 바로 약수고 약초임을 깨닫는다. 바리데기는 이 약들을 이승으로 가져와 죽었던 부모님을 되살린다. 이후 바리데기는 신의 지위를 인정받아 굿판에서 만신(滿神)의 몸주가 되었다. 지금도 바리데기는 죽은 자를 위해 지내는 지노귀굿, 오구굿, 씻김굿 등의 굿판에서 신으로 받들어진다.

 

작가는 위에서 나오는 ‘물 구경, 꽃 구경’에 주목하여 같은 제목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이 작품은 늘 먹었던 물이 약수였고 늘 보았던 꽃이 약초였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사는 이곳이 바로 선인들이 꿈꾸던 바로 그 이상 세계라는 메시지와 함께 바리데기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약을 가져오는 과정을 조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작품 ‘눈물 하나가 바다를 일으킨다.’는 전통 병풍에 사각형 창틀 모양을 한 빈 병풍을 엇갈리게 덧 댄 설치 작품이다. 세우는 것에서 병풍과 유사할 뿐, 이동식 벽에 해당하는 병풍과 다르게 전체가 하나의 작품 구조로 존재한다. 이 작품 역시 바리데기가 여러 개 겹겹이 가로막은 난관의 문을 통과하는 장면이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신 히프노스가 연꽃을 뒤집어쓰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바리데기를 지켜본다. 전혀 상반되거나 낯선 대상을 병치하여 상상의 확장을 꾀하는 방식이다. 라오미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낯선 만남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낙타같이 사자같이’는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정신 발달 과정으로 비유하고 있는‘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에서 가져왔다. 낙타와 사자가 엉뚱하게도 민화 장생도의 십장생 또는 책가도와 함께 그려 낯선 풍경을 연출한다. 중세 연금술사들이 원소 변환을 촉진하는 신비로운 물질로 믿었던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품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청춘의 여신으로 불리는 헤베, 불로초 역시 한 공간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만나고 있다. 이외에도 저승이나, 홀로그램 우주를 다룬 작품도 이번 전시에 포함해서 보여준다.

 

요컨대 화가 라오미 작품의 참 맛은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가볍게 터치하고 쉽게 비틀 뿐만 아니라 낯선 만남을 개입시켜 다소 긴장감 속에서 작품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 감정의 흐름은 충돌, 낯섦 그리고 화해라는 시각에서 읽혀진다. 비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바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로 만들어 낸다. 심지어 이승과 저승을 수평으로 잇는다. 그녀는 모름지기 민화를 기반으로 입체, 설치, 공공미술까지 나름 성과를 내고 있는 드문 예다.

 

그녀의 작품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지나치게 서사적 전개에 몰두한 나머지 시각언어의 밀도감이 느슨해질 개연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고 방법으로 영상 등 다른 미디어까지 확장해보는 방법을 생각해 봄직하다.

 

전시장으로 눈을 돌려보자. 전시장에서 바리데기 설치 작품 옆에 걸린 꼭두를 생각해 본다. 꼭두란 우리나라 전통 장례식 때 사용되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이다. 상여에 장식하는 하얀 꽃들이 작품 주변에 널브러지게 배치된 풍경도 상상해 본다.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풍경이 그지없이 혼돈스럽고 모호하다. 그 혼돈함과 모호함이 절정에 이를 때 외치고 싶다. ‘물 구경 꽃 구경하고 가시라’다. 화가 라오미가 전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논어에 나오는 유어예(遊於藝)를 떠올려본다. 예술의 경지에서 노닌다는 뜻이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이승에 거닐고 저승에서 노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