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신화적 무의식을 따르는 수평적 결합술의 세계, 라오미 작가

김남수   안무비평

 

#1. “잔치는 신들의 超宇宙的인 힘을 뜻한다.”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2. “틈새는 물질의 열림이기 때문에 ‘힘’의 중심의 의미가 황금고리에 부여된다. 그것은 “문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중심”이며, 거기에 뿔피리가 걸려 있기 때문에 ‘힘’이다.” 

(상소네티, <성배와 연금술> 중에서)

 

라오미 작가에게 회화는 하나의 ‘잔치’ 같다. 여기서 ‘잔치’에는 하나의 상[床]이 필요한데, 이는 마니에리슴의 용어로는 ‘타블로’[tableau], 즉 “우주를 구성하는 테이블” 같은 개념이다. 그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모티브와 이미지가 작가의 의도를 따라 배치되는 것이다. 호랑이와 사자의 혼혈, 복숭아, 북한의 꽃을 비롯한 기화요초, 금강산, 민화적 이미지, 문[門], 변형되고 유동화되는 건축 이미지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라오미 작가의 알레고리 전략과 신화적 무의식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지듯 하는 것이다.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제 작품을 예쁘게만 보지 마시고, 작품 속의 메시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작가가 봉인해둔 메시지를 봐달라? 이 기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요청은 라오미 작가가 하나의 ‘잔칫상’처럼 차린 수많은 이미지들의 세계에서 보아내기 힘든 부분이다. 동시에 이미지들의반복, 증식, 그리고 변형이란 초현실적-현실적 과정을 거치면서 ‘소우주를 통한 대우주의 구성’이라는 마니에리슴의 방법을 활용하는 지점에서 긴요한 것이다. 실제로 라오미 작가는 “이물관물[以物觀物]하라” 라고 발언한다. 물로써 물을 본다? 여기서 객관으로써 객관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객관으로 객관을 응시하는 관점을 만드는가. 어쩌면 이 지점에 대한 깊은 관심표명이 라오미 작가와의 대화 내지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마스터키가 될 것 같다.

라오미 작가가 진행하는 작업들은 굉장히 다채롭고 현란하면서도 동시에 단조로운 느낌을 얼핏 던져준다. 그 이유는 그 색채감각이나 배치감각이 탱화라든가 무신도라든가 감로도, 혹은 민화, 혹은 감모여재도 등등 전통적인 회화의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컨템포러리와는 다소 격차가 있는 듯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얼핏의 시각적 인상은 완전한 착오이자 걷어내야 할 환영이다. 마치 한 꺼풀의 샤막처럼 이 영향관계는 마니에리슴적인결합술의 우주를 새롭게 창출하려는 ‘미시모방’(벤야민)으로 바뀌어질 수밖에 없다. 뭐랄까, 라오미 작가는 수많은 동서고금의 신화적 이미지들 사이에 ‘틈새’를 열고, 그 열린 경계마다 황금고리를 걸어서 “신의 얼굴과 대면하는 거울”과 같은 알레고리의 세계를 구성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날이 오는 어떤 신성성의 유토피아 세계. 이런 의미에서 라오미 작가의 작품은 장식적인 미술처럼 보이다가도 컨템포러리의 팝아트처럼 확 육박해왔다가 다시 종교적 ‘힘’을 빌린 샤머니즘적 컨템포러리로 슬쩍슬쩍 변형생성된다. 이는 실로 이상한 일이며, 그가 추구하는 이 ‘힘’의 영역이 단순히 알레고리의 지적 해석적 영역이 아니라 직접 체험이자 그것도 물신주의적 체험으로서 그 부정성을떨쳐낸 형태임을 증명한다. 이는 무슨 얘기인가.

마니에리슴은 우리에게 흔히 매너리즘으로 읽히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서 “육화된 신성”의 타블로[tableau] 전략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잠깐 풍미했던 사조였다. 195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른 저변에서 이 마니에리슴이 다크컬처, 고딕, 심층무의식, 자기조직적 생태학 등등과 어울리며 생명성과 신성성의 징후가 짙은 세계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라오미 작가가 단순히 전통을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라 이러한 전통과 현대 사이의 황금고리를 엮어서 물신주의라는 어두운 힘을 긍정성의 힘으로 작동시킨다고 말한다면 과할까. 

아닌게 아니라 라오미 작가는 유토피아와 자본주의 사이의 계약 관계를 어떤 탁월한 물신주의적 회화 세계로 표현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20세기 영화의 현대적 리듬과 속도로 기존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태초와 고중세의 이미지조차 ‘차이의 정치학’으로 지금 이곳으로 끊임없이 호출하는 것이 자본주의고, 그 호출의 신호음이 유토피아 아닌가. 욕망의 순환곡선은 이 호출과 그에 잇다르는 차이의 문화적 소비가 연결되는 망 속에서 자체의 호흡을 가져가고. 라오미작가가 자주 다뤄온 동아시아의 유토피아 이미지 역시 이 욕망의 순환적 궤적 속에 개입하거나 이미 들어가 있는 경우로 보이기도 한다. 가령, 십장생 이미지라든가 무릉도원 이미지라든가 민화 이미지라든가 그 이미지 내부에 이형변형된 생명체가 초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세계-내-의 존재로 우리 앞에 육박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의 시각적 이미지들은 대체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타자의 욕망, 회고된 욕망처럼 느껴질 소지가 있다.

라오미 작가가 메시지를 수신함에 꽂아두는 것은 위의 쉽게 파악되는 욕망의 순환궤적 속에서 시장적 질서, 시각적 관람 패턴에 복무하는 것을 거부하는 문화적 태도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에는 그러한 거부의 스탠스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독특한 물신주의적 과잉으로부터 새롭게 읽혀질 여지가 다분하다는 의미다. 즉 물신주의를 가속화시켜서 오히려 이 세계 전체가 물신주의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처럼 물신주의 자체로부터 새로운 지각과 인식이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포스트-페티시즘이라고 할 만한 기묘한 형국. 과거 대감굿에서 “욕심도 많고 탐심도 많은 내 대감”에게 “앞다리 선각 뒷다리 후각 양짓머리 걸안주” 없이도 대감신에게 큰 복과 재수를 받는 원리가 이 형국이다. 독일 문화학의 거장 하르트무트 뵈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물신숭배를 믿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물신숭배주의자들이다.”

물신숭배적 태도로 물신주의를 배지기한다는 것, 초현실적 이미지를 현실적인 발상과 배치 속에 묘하게 결합한다는 것은 라오미 작가의 ‘이물관물’[以物觀物]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화적 전형, 즉 민화로부터 나온 앙증맞은 이미지가 무한증식하면서 프랙털적 시각 세계를 낳는다거나 사진 스튜디오에 놓여진 금강산 병풍처럼 보이는 이미지 앞에 호랑이와 사자의 혼혈동물들이 ‘현신’[現身]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체적 변신의 동사 중 하나 – 즉, “영상적 이미지로 몸을 나타내다” 라는 식으로 침투하고 교란하는 퍼포머티브가 작동한다거나 청동거울처럼 보이는 북들의 연속적 배치가 그 북의 가죽을 긋는 파괴적 행위로 금속성의 울림을 환청하게 한다거나 하는 작업들이 큰 방향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 전환은 문의 틈새처럼 눈을 바짝 대고 봐야 하며, 마음을 열어야 한다. 열린 심안[心眼].

라오미 작가는 얼핏 장식적으로 보이는 물신성의 이미지에 복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의 가속과 증식 그리고 파괴에 의해 새로운 결합술[ars combinatorial]의 가능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라오미 작가는 말한다. “전통적인 소재와 현대적인 발상을 한 폭의 그림에 담으려다 보니, 고전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고전적인 인물들뿐인가. 어느 목욕탕 장면에는 어떤 호랑이 닮은 요괴가 욕탕 가까이 있는데, 곁에는 한 소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 알레고리적 장면의 속사정은 이들의 만남과 결렬이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신화 속의 가부장적 체제를 현대적으로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알량한 한 시대를 넘어서서 초역사적 비전을 ‘미녀와 야수’처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메시지를 수신하려면, 라오미작가의 황새 같은 지식의 거대한 뜀뛰기 혹은 바람구두 스타일 걸음을 뒤쫓을 필요가 있다. 그의 뒤를 쫓다가 뱁새걸음은 가랑이가 북 찢어지며 종종종 하겠지만, 문득 하늘의 별자리를 보게 될 것 같다. 하늘의 타블로[tableau]가 차린 잔칫상.

Rhaomi and the World of Horizontal Ars Combinatorial following the Mythical Unconscious

Kim Namsoo    Choreography Critic

 

#1. “The feast means the supernatural power of the gods”. (Gaius Sallustius, historian)

 

#2. “Since the gap is the opening of matter, the golden ring/circlesignifies the center of ‘force’. It is the ‘center’ because it is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door’, and it is ‘‘force’ because a horn is hung on it.” (Paul-Georges Sansonetti, from Graal et Alchimie) 

 

Painting for Rhaomi is just like a ‘feast’. For a ‘feast’, a table is needed, which is called ‘tableau’ in Maniérisme, that is, a concept similar to “a table constituting the universe”. So many motifs and images are arranged, as it were, on the table according to the intention of the artist that the table cannot bear it anymore. In Rhaomi’s work, we find innumerable elements of allegorical strategies and mythical unconsciousness as if they are placed on a table: the hybrids of tiger and lion, peach, strange flowers and outlandish grasses including flowers of North Korea, Mount Kumgang, images from folk paintings, door, architectural images that are transformed and fluidized. The artist’s message is clear: “I hope you do not view my works just as pretty works of art, but see the message in them.” 

 

Asking the audience to look at the message sealed up by the artist? This basic and legitimate request, however, is a difficult task in the world of innumerable images arranged by Rhaomi like a ‘banquet table’. At the same time, it is crucial to utilizing Maniérisme’s method of ‘constructing the macrocosm through the microcosm’ through the surreal-realistic process of repetition, multiplication, and transformation of images. Actually, Rhaomi says, “See objects through the perspective of objects (以物觀物)”. Seeing objects through objects? What does it mean here to see objects through objects? How can you establish a perspective to gaze on the object through the object? Perhaps a deep interest in this point is likely to be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dialogue with Rhaomi or her work as a whole. 

 

The work Rhaomi is undertaking is extremely multifarious and dazzling, but at the same time it seems to have a tinge of monotony. Since her sense of colors and composition seems to have been influenced by traditional paintings such as Taenghwa (幀畵: altar portrait of Buddha in the Buddhist temple), Mooshindo (巫神圖: the painting of Shamanistic spirit), Ghamrodo, folk panting, or Ghammoyeojaedo (感慕如在圖: decorative painting depicting ancestral shrines and tablets), her work at first glance looks quite distant from contemporary painting. However, this impression that one gets at first glance is a complete error and an illusion that has to be removed. Like a sharkstooth screen (a translucent curtain for stage), the influenceis bound to be transformed into a ‘micro-mimesis’ (Benjamin) to create a new universe of the ars combinatorial of Maniérisme. For Rhaomi is opening up the ‘gap’ among the myriad of mythological images of all times and places, and hanging the golden ring/circlearound each open boundary to build a world of allegory like the ‘mirror to encounter God face to face’. A utopian world of certain sacredness that looks vague now, but that is in time to be encountered face to face. In this sense, Rhaomi’s work sometimes looks like decorative art, sometimes like contemporary pop art, and then is transformed into contemporary shamanic art resorting to the religious ‘power’. This is indeed a strange thing, and proves that the domain of the ‘power’ she pursues is not merely an area subject to intellectual interpretation of allegory, but a direct experience, a fetishistic experience at that, with its negativity removed. What does this mean? 

 

Maniérisme is usually known to us as Mannerism, which was a trend popular for a short period of time between the Renaissance and the Baroque, focusing on how to use the strategy of the tableau of the “deity incarnate”. On the outskirts of Postmodernism, Maniérisme has emerged in the West since the 1950s as a world-view characterized by its emphasis on vitality and sacredness, a world-view particularly associated with the dark culture, gothic, the deep unconscious, self-organizing ecology and so on. Is it too much to say that Rhaomi is not an artist who merely reproduces tradition, but rather combines the tradition and modernity with the golden ring/circleto tap into the dark power called fetishism to activate the force of affirmation? 

 

To be sure, Rhaomi’s work can give the impression that it expresses the contractual relationship between utopia and capitalism in a kind of superb fetishist painting. Isn’t it that in the modern rhythm and speed of the 20th century film and with its ‘politics of difference’, capitalism ceaselessly summons to us here and now not only the existing images but also the images from the prehistoric times, the ancient and medieval ages? And isn’t it that the dial tone of the call is utopia? In the network that connects this call and the subsequent cultural consumption of differences, the recurring curve of desire retains its own breath. The utopian images of East Asia, which Rhaomi has often drawn upon, also seem to intervene in this cyclic trajectory of desire or is already in it. For instance, the images of the Ten Longevity Symbols (十長生), The Peach Blossom Spring (武陵桃源), and the images of folk paintings as well as the living organisms that have been transformed within those images vividly come to us as surrealistic and at the same time realistic presences within-the-world.The visual images of desire, however, are likely to be felt as the desire of the other, the recollected desire that capitalism requires. 

 

Rhaomi puts the message in the mailbox and it is a cultural attitude that refuses to serve the market system and the visual pattern of watching art works in the above-mentioned cyclic trajectory of desire that can be easily grasped.And her work contains such a stance of refusal, which means there is room for a new interpretation, unlike the unusual fetishist surplus.In other words, her work accelerates fetishism and proves that the world as a whole is rather sustained by fetishism, and new perceptions and awareness emerge from the fetishism itself like the saying “anguish itself is enlightenment”. A strange situation that may be called post-fetishism. This is how one receives blessings and good fortune from Daegamshin (the spirit of the house site) without all kinds of offerings devoted to “greedy and avaricious Daegamshin". Hartmut Böhme, an authority on German cultural studies, says, “Our reason does not believe in fetishism, but culturally, we are fetishists.” (Hartmut Böhme) 

 

To tackle fetishism with a fetishistic attitude, and to ingeniously combine surrealistic images with realistic ideas and arrangements, is Rhaomi’s strategy to ‘see objects through objects’ (以物觀物). In Rhaomi’s work we see cute images borrowed from folk paintings, a well-known cultural paragon, proliferating infinitely and giving birth to the visual world of fractals; hybrids of tiger and lion being ‘incarnated’ (現身) (one of the verbs to refer to bodily transformation in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三國遺事』) in front of the images in photo studio that look like a folding screen depicting Mount Kumgang; activating the penetrating and disturbing performative like “representing the body with visual images”; consecutive placement of drums that look like bronze mirrors and the destructive act of tearing up the hides of drums creating auditory hallucinations of metallic vibration. All this work brings on a fundamental change of direction.The change must closely observed like a gap in the door, and we should open our mind.The mind’s eye wide open. 

 

At first glance, Rhaomi does not yield to the decorative images of fetishism, but rather allows us to move towards a world where new ars combinatorial is possible through acceleration, proliferation, and destruction of those images. She says, “Trying to put traditional materials and modern ideas into one canvas, classical characters are bound to appear.” Only classical characters? In a scene depicting the bath, a tiger-like specter is near the bath, and beside it is a girl, covering her face with her hands. This allegorical scene makes us ponder over for a while the meaning of their meeting and parting. Perhaps it is a criticism from a modern perspective of the patriarchal system as it is found in mythology. Or it might be a representation of the trans-historical vision beyond this petty and frivolous era like ‘Beauty and the Beast’.To receive the painter’s message, one needs to follow the giant, stork-like skipping of her stunning knowledge or her steps that can be probably compared to the ‘semelles de vent’ (phrase referring to the poet Rimbaud) Following her with mincing steps, we may suffer from torn-apart crotch. Yet suddenly we are likely to see constellations in the sky. A table of feast prepared by the tableau of heaven.